2023. 5. 1. 00:00ㆍ당신의 주파수
당신의 주파수 20230506
호구라는 입구
정끝별
범고래들이 백상아리를 몰아간다
한 범고래가 주둥이로 백상아리를 밀어 올리고
다른 범고래가 강철 이빨로 백상아리 옆구리를 물어뜯는다
또 다른 범고래가 빠져나온 백상아리 간을 삼킨다
이 백상아리는 며칠 전
잭나이프 턱과 톱니 이빨로 물범을 반 토막 냈고
놀란 눈에 반 토막 나 도망치는 물범을 쫓아가
커다란 아가리를 벌려 남은 반 토막 물범을 삼켰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반 토막 난 물범도 그렇게
작은 펭귄을 송곳니로 물고 내동댕이치고 뜯어먹었다
허공을 빙빙 돌던 도둑갈매기도
작은 펭귄을 발톱으로 낚아채 부리로 쪼아먹었다 그렇다고
작은 펭귄이 가엾고 귀엽기만 한 건 아니다
제 자리를 지키려 바다로 새끼 펭귄을 밀어뜨리고
바다에 뛰어들 때면 앞선 펭귄을 밀어뜨리고
바다에 뛰어들어서는
물고기와 크릴새우를 잡아먹는다
물고기와 크릴새우는
더 작은 물고기 떼나 플랑크톤을 찾아
바닷속을 샅샅이 헤치고 다닌다
범고래에서 플랑크톤까지
그중 하나가
목소리 높여 정의를 외치는 너이거나
다정한 마음을 가졌다고 믿는 나이다
인간답다 안도하며
그중 하나로
튀어나온 입을 내밀고 달아나거나
끝 모를 입을 벌리고 달려간다
식구라 우기며
그게 다 우리가 지나온 문이었을 것이다
반 토막 난 마음에 대문니를 앞세우고
시작노트
환취처럼 타는 냄새나 피 냄새에 휩싸일 때가 있다. 내 안에 숨겨진 파괴성과 육식성의 발현이 아닐까 싶어 내가 무서워질 때다. 누군가 혹은 그 무엇에게 당한 내 상처에서 나는 냄새일 때 세상이 무서운 건 당연하지만.
자주 물리곤 하는 내가 때로 무는 존재이기도 하고, 물어뜯는 데 능한 너도 누군가 혹은 그 무엇에게는 물어뜯기기 마련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인간을 앞세운, 포악한 정의나 가엾은 다정을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범고래에서부터 플랑크톤까지, 그 어디쯤, 팔 하나를 물린 채 대문니를 쩍 벌린, 내가 있다.
정끝별 |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부문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의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어 시쓰기와 평론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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