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 00:00ㆍ당신의 주파수
당신의 주파수 20230304
거미는 눈이 8개니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김혜린
거미가 허공에 발을 디디며 투명을 이해한다
거울에서 겨울까지
겨울에서 거리까지
발 디딘 곳마다
투명한
투명한 공간을 짓는 거미
본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과 같아서
나는 거미가 집을 짓는 마음을 이해한다
허공에 자아낸 공간 속으로
내가 가질 수 없는 날들이 날아든다
대설주의보와 불 켜진 집, 연착되지 않는 열차들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눈 내린 적 없는 겨울을 가지고 싶으면 어떡하지?
눈이 부족해 거리를 다 담을 수 없는 나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의 테두리를 내내 덧그린다
거미는 구석에서 구석까지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에서 공간까지
위태롭게 집을 걸어놓고
내가 발 디딜 수 없는 곳으로 건너가고
가끔 시야 밖에서 거리와 폭설은 조용히 무너져 내린다
눈 뒤에 사는 일은 무섭지 않다
무너지기 위한 왈츠를 배우는 일은
외곽에서만 자라나는 꿈도 꿈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을 것만 같던 집을 자꾸 그리면
수백 겹의 거울 속에는 또 내가 산다
거울 속의 나는 어느새 거미처럼 눈이 늘어나 있다
눈 속에서 붉은 열매가 속살처럼 터져 나온다
이 불빛은 누군가를 재울 수도 있는 공간이라
그 속에는 나도 살고 있다
우리가 지난여름
눈 뒤에 걸어두고 갔던 빛이
아직 거미줄 위에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다
시작노트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다고 해 천수천안이라고도 부른다. 관세음보살의 천 개의 손은 지상 어디든 닿을 수 있고, 천 개의 눈은 지상의 어디든 볼 수 있다고 한다. 천 개의 눈을 가지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거미에게도 8개의 눈이 있으니, 어쩌면 거미는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미줄 위로 인간인 나는 가지지 못한 것들과 간직하지 못한 것들이 걸려든다. 투명한 허공. 그곳을 오래 바라본다.
김혜린 | <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쓸 수 있는 것을 쓰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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