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표함에 기의를 넣어 주십시오

2023. 1. 2. 11:34당신의 주파수

당신의 주파수 20230102

기표함에 기의를 넣어 주십시오

 

김건영

 

 

 

 

여행을 다녀왔다. 살림을 합쳐 같은 집에서 살아가게 된 동거인이 생겼고,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신혼여행은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눈 후 급하게 여행지를 결정했다. 눈이 잔뜩 쌓인 곳에 가보자며 두 사람이 의견을 모아 북해도로 떠나기로 했다. 이제 아주 젊은 나이는 아닌 두 사람은 이 기회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패키지여행을 가보기로 했다. 숙소를 정하고, 지도를 검색하여 동선을 짜고, 거리를 헤매며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는 두 사람은 패키지여행이 편했지만 무척 낯설었다. 관광버스에 올라 여행지에 도착하면 내려서 잠시 구경을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일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관광 명소로 이동하는 동선 자체가 길었다. 실제로 여행지 한 곳을 구경하는 것은 아주 잠시뿐이다. 그 시간의 몇 배나 되는 시간을 버스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거나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착을 바랄 뿐이었다.

 바깥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겨울나무들의 가지에 눈이 잔뜩 쌓여 휘청거리는 광경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아름답지만 지독히도 서늘한 풍경들 사이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국의 표지판은 대부분 한자로 표기되어 있어서, 더듬거리며 한자를 읽었다. ‘中央分離帶’라던가, 지금 향하는 곳의 지명 같은 것들을 들여다보았다. 지명은 한자의 본뜻을 생각하다 말고 하단에 적힌 영어 음차를 입속으로 가만히 되뇌어 보기도 했다. ‘小樽’은 영어로 ‘Otaru’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오타루와 소준(小樽) 사이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가 헐겁다는, 언어의 특징을 재차 떠올릴 수 있었다. 

 호텔에서는 세면대에 붙여진 안내 문구 따위를 읽었다. 食水, 可能 따위의 한자를 읽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일본어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는 말인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밑에 영어도 적혀 있어 식수로 사용 가능함을 알았다. 낮에 온천에서도 같은 두 한자를 읽었었는데, 食水, 適合을 읽고 온천 음용수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영어로는 마시지 말라고 되어 있었던 기억이 났다. 

 골초인 탓에 버스에서 내리면 제일 반가웠던 喫煙所. 끽연이라는 어휘는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잘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관광버스가 시내를 관통할 때는 動物病院이나 齒科의 간판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본어로 쓰인 것은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미지의 문자였으므로 나는 읽을 수 있는 한자가 나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무척 신이 났다. 한자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라서 아이처럼 더듬거리며 문자를 읽어나갈 때의 기쁨이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렸을 적 한글을 깨칠 무렵 거리에서 간판을 그렇게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이하게도 이국의 땅에서 한동안 읽는 것에 조금은 진력이 난 상태를 회복하는 행운을 얻은 기분이었다.

 며칠간 수많은 간판과 표지를 읽어대며 여행을 다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읽을 수 있었던 표지들 중 대부분은 경고 문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건물 안쪽 문에 부착된 ‘非常時以外開閉禁止’라는 문구를 읽고 난 이후였다. 정보전달 체계의 언어는 대부분 금지나 위험을 표지할 때 강력하다. 썩 신통치 않지만 감각전달체계의 언어를 추구하는 나는 사유의 순간에 항상 비상시이외개폐금지를 거부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해야 한다. 또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비상 상태였으니 저 문을 여닫아 드나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것이 생각보다 쓸모없는 일이며, 당장은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사니까 가난하지. 참 쓸모없는 존재로군. 자책했다. 그리하여 한 마디의 말장난을 되뇌며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표함에 기의를 넣어 주십시오. 우리의 언어와 정신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김건영 | 2016년 현대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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