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 00:00ㆍ당신의 주파수
당신의 주파수 20230304
무제
김녕
근래에 드라마 <더 글로리>를 정신없이 정주행하다가 덜컥, 두려움을 느낀 장면이 있었다. 극 중 악역인 박연진이 제 딸아이가 주인공 문동은과 한 교실에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대목. 학창 시절에 문동은을 뜨거운 고데기로 지져가면서까지 악랄하게 괴롭혔던 박연진은 딸이 혹시라도 같은 방식으로 보복을 당할까 두려웠겠으나, 그 두려움에 공감한 것은 아니고. 저 어린아이에게 선생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별안간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불거졌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것이다. 그 선생은 ‘방과 후 리코더 교실’을 신청한 나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리코더 지진아 반에 굳이 왜 들어가려고?”
진심으로 방과 후 교실에서 리코더 강습을 받는 아이들을 리코더 지진아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서류 꾸밀 일이 하나 늘어나는 게 귀찮아서 한 소리인지는 지금 와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이토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어렸던 내가 받은 충격이 작진 않았나 보다.
하루는 국어 교과 과정 중, 시조를 지어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지목을 당했고, 종장의 중간구에 3, 4글자가 아니라 5글자를 집어넣었다는 이유로 선 채로 10분 넘게 욕을 먹었다. 새삼 돌이켜보건대 그토록 지독하게 멸시를 당해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나는 늘 자신감이 부족하고 자기주장을 할 줄 모르는 소극적인 인간으로 살아왔는데, 내가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나를 깎아내리고 멈춰 세우게 하던 목소리가 바로 그 선생의 목소리라는 걸 돌연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나야 ‘이야, 그런 못된 선생이 다 있었지.’ 하고 말지만, 그때 상처를 입은 아이는 내 내면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자존감 도둑이 되어버렸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어쩐지 내가 문학을 전공하고 평론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에도 단 한 줄의 우연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얄궂은 생각이 들곤 한다. 괜히 비참하고 허망한 마음이 들게 하는 생각이라 웬만하면 얼른 몰아내려고 하는 편인데,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가지고 온갖 멸시를 줬던 사람에게 글로써 인정받고 싶은 비틀린 오기가 뱃속 어딘가엔 들어앉아 있었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나라는 인간의 아주 작은 일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오직 그것만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런 비틀린 오기보다 훨씬 큰 애정이 없었더라면 여태까지 읽고 쓰는 일을 해오지 못했겠지. 다만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싸움의 어려운 점이다.
김녕 | 사실은 보기보다 별 생각이 없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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