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1. 20:54ㆍ당신의 주파수
당신의 주파수 20230910
사랑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 나이
안미옥
얼마 전 일을 하다가 나무가 궁금해서 쉬는 시간에 잠깐 영상통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무가 대뜸 내게 말했다. “나 엄마랑 노는 거 재미없어, 아빠랑 놀 거야. 엄마 싫어.” 나는 나무가 지금 서운한 마음이 큰 상태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 엄마는 나무가 좋은데, 나무는 엄마가 싫어?” “응, 싫어. 엄마랑 안 놀 거야.” 나무는 시종일관 나와 놀지 않겠다고 하고는 눈도 맞추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 왔더니 나무는 곤히 자고 있었다. 잠든 얼굴은 평온해 보이는데 자기 전까지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음 날 아침에도 대뜸 “나 엄마랑 안 놀 거야. 엄마랑 노는 거 재미없어.”하는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최대한 알고 싶어서 나무에게 이유를 물었다. “엄마가 좋은데 엄마가 싫어서.” 나무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놀자고 거실로 나를 잡아끌었다.
만 3세는 양가감정을 알게 되기에 충분한 나이인 걸까. 좋으면서 싫고, 사랑하지만 화가 나는 그런 감정 말이다.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기록하는 비공개 SNS 계정에 나무의 최근 변화를 올렸다. 피드를 본 연준 언니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나무 이제 ‘사랑’의 복잡한 마음을 아네. 엄마가 좋아서 미운…!” 나는 좋지만 싫은 감정이 공존한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사랑하는 관계 안에선 미움이 사랑의 과정이자 속성일 수 있다.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해서 미운’ 감정이 오래도록 있었다는 걸 최근에 깨닫게 된 일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아빠를 미워해 왔다. 감정을 소화할 겨를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무엇도 해결되지 않고, 해결하려 하지도 않는 상태로 말이다.
그러다 어버이날 전날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아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써줘서 미안하다는 말과 몸이 많이 좋지 않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말에 대뜸 겁부터 났지만, 나무는 잘 있다고, 몸이 어디가 얼마나 안 좋냐고 차분하게 물었다. 그냥 쉬면 된다고 하면서 아빠는 “걱정 하지마 미옥이 사랑한다 수안이도”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마감을 하러 카페에 나와 있었는데, 카페에서 그만 왈칵 눈물이 났다. 아빠는 사랑한다는 말뿐만 아니라 어떤 애정 표현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화를 내거나 혼을 내거나 감정을 폭발시키는 모습을 자주 보고 자란 나는 아빠의 다정한 한마디에도 마음이 와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의 최근 사진 몇 장을 보내주다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몇 마디 말을 보태 답장을 보냈다. 아이를 키우며 부모의 시간을 생각한 적이 내게도 자주 있기 때문이다.
“아빠도 나 키우면서 행복하고 기뻤던 순간도 있었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순간만 있는 게 아니고.”
아빠에게선 바로 답장이 왔다.
“고통은 없어.”
“항상 너 생각뿐 표현이 부족해서.”
고통은 없다는 망설임 없는 말. 나는 힘껏 울음을 삼켜야 했다. 카페에서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어서 울음을 꾹꾹 누르고 아빠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는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 아빠에게 딸로서 인정받고 싶고, 온전히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아.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마워.”
그러자 아빠도 곧바로 답했다.
“이해를 해줘서 고마워.”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화해의 순간이 오는 걸까. 아니면 기적적으로 아빠와 내가 잠시 주파수가 맞은 날이었던 걸까. 오랫동안 켜켜이 쌓였던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일이 이렇게 한순간에 가능할 줄은 몰랐다. 앞으로의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대화 앞에서 나는 한없이 어린 딸이었고 아빠는 사랑 많은 아빠였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안미옥 | 시인. 시집 『온』, 『힌트 없음』,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