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 00:00ㆍ당신의 주파수
당신의 주파수 20230708
마트에서
이다은
마트에서 백인이 내게 대뜸 물었다. 에그 누들과 쌀국수 중 무엇이 더 낫냐고. 각각의 면으로 무슨 요리를 할 수 있느냐가 아니고 더 나은 것이라니. 나는 영어로 길게 설명하기 귀찮아, 볶음에 적합한 에그 누들을 추천해 줬다. 서양인이니 수프 누들보다는 프라이드 누들에 더 익숙하겠거니 했다. 그리고선 차이니즈 배추를 사서 나왔다. 걷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인이 아시아 코너에 있다는 이유로 그걸 물으면 인종차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무엇보다 인사도 없이 불쑥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가 싶어서. 유럽에서 지낸 지 4개월쯤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매 순간 국제적인 존재가 된다.
한국에서 나는 출생 등록지에서 내내 살아왔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건물에 세 든 점포의 역사와 주인의 가정사, 전봇대의 불법 광고물 방지 시트에 적힌 감상적인 문구의 정책적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곳곳에 얽힌 내 유년 전부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언어 구사 능력의 한계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알지 못해 말할 수 없다. 커리 부어스트가 한국의 떡볶이처럼 이 나라 사람들의 추억의 음식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떡볶이에 얽힌 초등학교 하굣길의 소란, 손에 쥐고 있는 동안 미지근해진 오백 원짜리 동전을 주인의 차가운 손에 건넬 때의 감촉, 컵에 한가득 담긴 떡볶이를 하수구에 떨어뜨려 울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의 짓무른 눈가의 따가움을, 커리 부어스트를 대입해 치환할 방법을 나는 모른다. 킥보드를 타고 커리 부어스트 매장으로 달려드는 유럽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유로 동전을 들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어느 날은 관광하기 위해 인근 도시에 갔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산책로를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오랫동안 걸었다. 그 끝에는 공원이 숨겨져 있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후기도 없는 곳이었다. 인종도 구성원도 다양한 각각의 현지인 가족들이 돗자리를 깔고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지엽적인 순간이었다. 대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마냥 조용하게 느껴졌고, 나는 조용과 평화가 어째서 연결되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혼자인 관광객 아시아인을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공원을 이르게 떠났다. 도서관의 책 한 쪽을 찢어 훔쳐 가는 기분이 되었다.
어렸을 때 나의 목표는 동네를 떠나는 것이었다. 내가 나의 어느 부분도 누락시키지 않고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한국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유년과 고추장으로 이뤄져 있고, 이곳에서 나는 빌려온 평화와 차이니즈 배추로 이뤄져 있다. 무엇이 더 나은 걸까. 나는 에그 누들과 쌀국수 중 하나를 고르는 마음으로 묻게 된다.
이다은 | 극작가. 몸과 그 몸이 거주하는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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